극장의 위기: 우리에게 극장이란 무엇이며, 여전히 중요한가?

김신재

팬데믹 이후 시네마의 위기가 거론될 정도로 극장 중심의 영화 문화나 산업 또한 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와있는데요. 시장이나 매체 환경에 대한 인식도 재편되고 있고, 이제 영화를 새로 정의해야 한다는 분들도 꽤 있으시고요. 사실 독립영화의 경우 감염병 유행 전부터 수년에 걸쳐 관객이 줄고 있다,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그때 이미 개봉 대신 OTT로의 직행을 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꽤 있었지요. 그런 맥락에서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의 독립영화와 극장 배급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개봉을 준비하시는 동안 물론 한편으로는 기대도 있으셨겠지만, 좀 복잡한 심경과 고충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김동령

먼저 ‘영화-시네마의 위기’, ‘독립영화의 위기’, ‘극장의 위기’ 이 세 가지는 서로 완전히 다른 위기라서 분리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독립영화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말에는 선듯 동의할 수 없고요(웃음). 독립영화는 늘 어려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합적 상태로서 흔히들 반복하는 ‘독립영화는 어렵습니다, 또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와 같은 말은 반복되는 빈껍데기 같은 말이거나 사기에 가까운 말처럼 느껴져요. 만약 독립영화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면 당연히 1차적으로 무엇을 독립영화라고 말하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겠죠. 그런 다음 독립영화는 도대체 어떤 지점에서, 왜 어려워지고 있느냐, 라고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참 난감한 상황인 것 같아요. 독립영화는 이명박근혜를 지나오면서 너무나 오랫동안 정치적 명분을 가지고 싸우는 데에만 집중했고, 지금은 내부에서조차 독립영화를 정의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레토릭이 대세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대단히 무능하고 게으른 태도라고 생각되고요. 왜냐하면 실제로는 독립영화계는 누구보다 신자유주의를 빠르게 흡수하고 거기에 복무하는 형태로 가고 있거든요. 사실 ‘독립영화’라는 용어 자체가 작은 영화, 민족 영화 등등의 비제도권 영화들이 ‘영화제’라는 관문을 통해 제도권에 자리잡으면서 만들어지게 된 용어라고 봤을 때, 그동안 독립영화가 자신의 영역을 지켜온 논리는 과대포장되고 신화화된 부분이 있어요. 실제로는 그 논리도 빈약하지만요. 만약 지금도 독립영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어떤 종류의 독립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독립영화의 가치는 무엇이고, 국가의 지원은 무엇을 향해 있어야 하는지 공론장이 작동했어야 했는데, 이 부분은 오랫동안 지원금을 타기 위한 소수의 거버넌스 논리로만 전락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아까 말씀하신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OTT로 이탈하는 현상이 심한 곳은 상업영화인데, 사실 상업영화의 상황과 독립영화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오히려 독립영화의 경우에 전적으로 지원금에 의존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실제로 통계를 좀 들여다봐야겠지만 오히려 극장 개봉 지원비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어요. 그런데 이들을 상영할 수 있는 스크린 환경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유 중에 첫 번째는 CGV 같은 대기업들이 아트하우스 같은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던 관을 코로나 핑계로 바로 없애버렸기 때문이고요. 원래 독과점으로 비난받는 것을 법으로 규제받기보다는 독립예술영화를 알아서 상영하는 쪽이었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재빠르게 돈 안 되는 아트하우스부터 다 없앴잖아요. 그럼 현재 남아있는 ‘독립예술 전용관’들이 지금 개봉되는 독립영화를 소화할 만큼 있는 거냐, 아시다시피 전국에 국가 지원을 받는 독립예술 영화관이 70여 개가 있고 영진위 지원을 받는 곳이 25개인데요. 이 중 예술영화 전용관들은 한국의 독립영화보다는 수입 영화, 특히 몇 년 전에 개봉했다가 흥행한 아트 블록버스터나 고전예술영화들을 재개봉 하고 있어요.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1년에 수천 편 만들어지는 독립영화가 살아남아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스운 거냐면 독립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과 스크린은 거의 없는데 개봉 지원비용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되게 이상한 상황이에요.

우리는 <거미의 땅> 때 처음 극장 개봉 지원을 받았는데 2천만 원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저희가 정말 배급에 관여를 안 했어요. 우리는 제작까지만 창작자의 의무이고 배급은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무튼 영진위 통합전산망을 보면 <거미의 땅> 전체 관객 수가 1300명 정도가 들었어요. 저는 사실 그 정도면 많이 찾아온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중 600명은 무료 시사회를 통해서 영화를 본 관객이었어요. 그러니까 영진위 개봉 지원비로 티켓을 구입한 뒤 이벤트에 당첨된 관객들을 무료 시사회에 초대했기 때문에 그 숫자가 다 카운팅 된 거죠. 실제로 돈을 내고 티켓을 사서 <거미의 땅>을 관람하러 온 관객은 700명 정도구요. 다시 말해 1300명은 허수고, 진짜 개봉 성적은 700명 미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극장 개봉이 끝나고 굉장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극장 개봉을 한 번 해보니 이 시스템이 너무 이상하다. 이 개봉 지원금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작지만 가치 있는 영화를 문화적 다양성 차원에서 국민이 더 많이 볼 수 있게 지원해주는 제도인데, 그 돈은 정말 희한하게 유령 관객을 생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형식으로 지원금이 쓰여지고 있다는 게 이제 가장 큰 문제의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개봉 지원을 신청하고 4천만원을 받았을 때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게 됐죠. 이번에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최근 독립예술영화 개봉방식이, 마케팅 방향이나 이벤트 방식이 상업영화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 되더라구요.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독립영화는 어차피 상영할 극장도 몇 개 없고, 상업영화처럼 몇십 억을 들여서 광고를 할 수도 없는데 왜 그렇게 비슷한 방식으로 개봉이 진행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우리는 최소 4-5번에 걸쳐 진행되는 무료 시사회를 최소화하고 싶다고 배급사에 요청했죠.

김신재

모든 배급사가 그렇게 하는 건 아니겠지만, 개봉한다고 하면 으레 관행적으로 하는 그런 걸 하지 않기로 하셨군요.

김동령

네, 일반 시사회 빼고 VIP 시사회, 그리고 오프로 진행되는 언론 시사회를 안 하기로. 특히 언론 시사회는 우리 영화하고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현재 영화의 언론 시사 시스템은, 배급사가 보내온 보도자료를 거의 그대로 받아서 기사로 내주는 거거든요. 영화를 보든 안 보든 상관없는 방식으로 생산되는 기사들이죠. 그래서 굳이 대관비를 쓰는 것보다 온라인 언론 시사를 했고, 여기서 우리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더 이야기를 듣고싶어 하는 기자들은 추가로 연락이 왔죠. 서면 인터뷰든, 대면 인터뷰든 그런 방식으로 진지하게 유통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까요. 시네마달은 어쨌든 창작자를 존중해주는 회사이기 때문에 다른 개봉 방식을 원한다고 했을 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그래도 우리의 문제의식에 동의해줬어요. 물론 지금 독립영화의 배급은 전반적으로 관성에 젖어가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모두들 지원금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니까 이 좁아터진 구역을 당연시 여기고, 가능하면 여기에 적응하면서 생존하는 것이 중요하지, 의문을 가지고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건 너무나 피곤한 일이니까요. 처음 배급회의를 진행했을 때 약간 놀랐던 기억은 나요. 우리 영화의 목표 관객수를 처음에 10만 명으로 잡고 그에 맞는 홍보 방향을 준비해주셨어요(웃음). 아무리 대중적인 독립영화도 몇 년째 만 명 이상의 관객을 넘기는 건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우리 영화로 10만 명이 든다는 건 남한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거거든요. 계급적 혁명 뿐 아니라 인식론적 혁명이요.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 우리 영화로 최대 2천 명 보면 많이 보는 거니까 좁고 깊게 가자고 말씀드렸죠. 흔히들 유명인사들과 GV하거나, VIP 초대해서 추천영상, 추천글 이런 거 만들지 말고 그냥 영화의 힘만으로 진행하자. 그래서 GV도 가능하면 영화 쪽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과 새로운 관점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유통시키고 싶다고 했구요. 그래서 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섭외를 했죠.

하여튼 개봉이 시작되고 나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스크린 환경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최악이었어요(웃음). 배급 관련해서 아무것도 안 한 <거미의 땅> 때 보다 훨씬 스크린 상황이 안 좋았는데, 일단 인디스페이스가 이관하느라 스크린을 줄 수 없었고, 그래서 서울에서 영화를 상영해주는 곳이 단 두 곳 뿐이었어요. 정말 심각하더라구요. 그 두 군데가 성북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독립영화전용관인 ‘아리랑시네센터’였고, 다른 하나는 명동 CGV씨네라이브러리에요. 좀 아이러니하죠. 서울에서 상영해주는 2군데 중 하나가 대기업 극장이라니. 예상치 못한 상황인데, 이게 아주 웃긴 이유가 있더라구요. 일단 현재 코로나 이후로 밀린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개봉해야 하는 작품들이 많아진 것도 스크린에서 밀려난 하나의 이유가 될 순 있겠죠. 그런데 그보다 큰 문제는 예술영화관들이 스크린을 거의 안 열어줬다는 거예요. 현재 영진위에서 지원금을 받는 극장 중 서울에는 독립영화 전용관이 2군데 있는데, 그게 인디스페이스와 아리랑씨네센터예요. 문제는 예술영화관들인데, 이 극장들이 수입배급사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고 요새는 제작 투자까지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코로나 상황에서 예술영화관들은 조금이라도 관객이 들만한 수입영화를 상영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재개봉작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보면 대부분이 자신들이 수입배급하는 작품들이에요. 지금 <킬링필드>(1985)를 창고에서 끄집어내서 스크린에 걸고 있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이번에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게 한국에서 독립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농담이 아니고 독립영화를 상영할 극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요. 흔히 대기업 독과점은 다 들어봤어도, 예술영화관들도 독과점 문제가 있다고 하면 쉽게 상상이 안 가고 이상하겠죠? 그렇지만 실제로 예술영화관들이 수입배급업을 겸하면서 동시에 제작까지 같이 하는 곳들이 많고 이들은 협회들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가능하면 손해가 안되는 영화들, 본인들이 수입했던 영화들을 상영하려고 하죠. 예전에 예술영화관의 스크린을 <옥자>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등의 영화가 독점했을 때 잠시 시끄러웠던 것 같은데 그때는 배급에 일체의 관심이 없어서 그냥 어떤 문제가 있나 보다 막연하게 생각했다가 이번에 참전해 보니 명확히 상황을 파악하게 된 거죠. 코로나 상황으로 극장이 힘들어지면 예술영화극장들도 당연히 문화 다양성을 지키기보다는 시장논리를 따르는 거예요. 그런데 영진위의 극장 지원금은 작은 영화들, 다양성의 가치를 가진 영화들에 대한 문화 향유권, 공공성의 가치를 인정받아서 지원이 이뤄지는 건데 공공성의 영역이 점차 사유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영진위는 현장을 모르는 상태로 거버넌스를 장악한 업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너무 오래됐어요. 그리고 이런 시장논리를 독립영화쪽 오피니언 리더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가막히고요*. 그럼에도 우리가 이번에 개봉 지원비를 신청한 이유는 일단 이렇게 작은 영화는 개봉을 해야만 언론에서 다루어지고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일반 관객들에게 노출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어찌 되었든 개봉 지원금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우리처럼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기록을 남길 수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극장 개봉이라는 방식을 고수하긴 했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배급과 유통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겠죠.

저희가 프랑스에 있을 때 장마리(Jean Marie Straub)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했던 관객과의 대화가 너무 인상 깊어서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그때 <역사수업>(1972)이라는 영화를 상영한 후에 사회자가 장마리에게 이 영화를 왜 만드셨나, 기획 의도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시작하더라고요. “이 영화는 사실 텔레비전을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다들 관객들이 벙쪘던 기억이 있어요. 아니, 이 양반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영화를 만들고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웃음). 그런데 자기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했을 때 텔레비전에서 상영할 영화를 만든 것이다 계속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이런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사회가 진짜 민주주의 사회다 라고도 호통쳤던 것 같아요(웃음).  암튼 TV 같은 공공적 매체에서 <역사수업> 같은 영화를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갑자기 제가 가지고 있던 텔레비전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너졌어요. 왜 흔히 영화가 TV에 비해서 갖는 우월적 문화 상징권력이 있잖아요. 흔히 텔레비전은 오락이나 뉴스를 보여주는 곳이고, 영화는 그보다 수준 높은 문화적 유통 카테고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런데 장 마리는 영화관이나 방송국, 영화와 TV라는 매체의 본질적인 차이는 원래 없다고 이야기한 거나 다름없거든요.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다르게 사용해온 것이 문제인 거죠. 실제로 페드로 코스타는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기 때 TV에서 심지어 크리스마스이브에 장마리의 영화를 방영해줘서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죠. 혁명기에는 그게 가능했었다고. 그래서 그때 장마리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영화도 유통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제발 많은 관객분들이 우리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태도는 아니고요. 우리 정도의 비관습적인 영화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매체의 공공성 뿐 아니라 유통의 공공성 또한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