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사의 목적은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라고들 말한다. 문자의 권력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 또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역사에 기록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사료(史料)화한다. 그런데 구술자(Interviewee, 이야기 하는 당사자)는 적어도 자신의 경험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언어적 능력을 가져야 하고, 연구자와의 적절한 만남이 있어야하며, 구술자의 삶의 궤적은 연구자들의 관심과 이해와 맞아야 한다. 이 모든 변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가 사실 매우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누군가의 구술 기록이 남겨진다면, 이는 아주 희박한 확률 속에서 건져 올린 기록이란 뜻이다.

그런데 기지촌 여성들처럼 사회적 낙인에 의해 은폐된 사람들이 구술사로 역사에 남겨질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공고한 사회적 낙인은 낙인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 조차 자신을 향한 낙인을 받아들이게 하고, 많은 경우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 구술사 작업이 가능하려면 구술자는 자신이 어떻게 곤란을 헤쳐 나왔는지 아니면 얼마나 억울한 피해자인지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이 만들어온 삶의 정체성을 긍정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피해자라도 자신의 ‘피해성’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이 뒷받침 될 때 타인 앞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가해자가 되기 보다 ‘피해자’가 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서사전략을 갖추게 되며, 재구성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왜 피해자인지 증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럴때 주로 ‘삶의 고통과 극복’이 주제가 되곤 한다.

문제는 누구나 삶의 곤란을 겪었다 해서 공인된 피해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기지촌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주로 ‘자발과 비자발’을 구분하는 프레임 속에 갇혀 있는데, 소위 창녀가 된 책임이 자신한테 있는지 아닌지 사회적 시선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몸을 파는 것 자체가 ‘더러운 어떤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우선 어딘가에 속해야 하는 강제성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선명한 피해자로서 비자발적 인신매매를 당해 기지촌 양색시가 되었노라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내가 만나본 사람들은 자발과 비자발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상황에서 ‘양색시’가 되었다. 오히려 자발과 비자발의 구분이 당사자보다 비당사자들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당사자들이 ‘강제에 의한’, ‘어쩔 수 없이’ 라는 서사전략을 취하게 된다. 박인순은 앞서 이야기 했듯 사람들 앞에서 납득할 만한 ‘이야기하기’의 전략을 갖추지 않았으며, ‘자발과 비자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나 관심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부끄러움도 없이, 적나라하게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떠드는 편이다. 대부분의 기지촌 여성들이 갈보, 창녀, 매춘, 성매매, 성노동자, 성노예 피해자라는 기호의 스펙트럼 그 어딘가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하는 곤란함을 겪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해 자발과 비자발을 스스로 평가해서 언어로 풀어내야 하는 어려움 속에 있기에 ‘이야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현장과 관계를 맺는 즉시 ‘이름짓기’에 대한 고민을 가능한 빨리 시작하는데, (실제 당사자들은 대체로 이 논의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지식인과 사회운동의 장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주로 학술의 장이나 사회운동의 논쟁 등을 통해 자리잡게 되는데, 점점 갈보, 창녀, 매춘에 이어 성매매, 성노예, 성노예생존피해여성 등 피해자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기지촌의 여성들은 좋은 의도일지라도 이렇게 자신들을 마음대로 호명하는 것을 보며 때로는 뒤돌아서 “야 창녀가 창녀지 씨팔!” “이젠 노예로 까지 부르냐”며 분개하는 모습도 보게 된다. 이럴 때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름이 당사자들보다 외부인에게 훨씬 더 중요하며, 그러다 보니 그들의 경험이 오히려 이 언어들의 속박에서 또 한 번 삭제되거나 누락되는 난제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다. 즉 ‘자발과 비자발’로 이뤄진 담론은 다소 성급하지만 기지촌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해자성’을 합의해주고 해결해 주기 위해 우리 사회가 (마지못해) 선택한 방법이고 여기에 포섭되지 않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발화시킬 능력은 없다.

알다시피 행위의 동기에 대한 질문은 대체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하는 질문이다. 사실 한국사회는 피해자에게 이런 유의 질문을 수없이 해왔다. 많은 경우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자성을 증명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당연히 피해의 순수성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다양한 결은 생략되고 뚜렷한 인과관계와 ‘피해 vs 가해’라는 이분법적 이야기만이 남게 될 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피해자로서의 이야기는 입증 가능한 사실인가? 입증가능하면 사람들이 믿어주는가? 사실 사람들이 믿어주면 입증 가능한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한때 윤금이를 ‘민족의 순결한 딸’로 만든 전력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것과는 달리 ‘윤금이’는 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해당 여성의 본명이 아니다. 그가 실제로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기록도 공개되어 있지 않다. 한편 반미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그녀가 민족의 순결한 딸이었음을 ‘믿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여성의 몸에 가해진 폭력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유통시킨 선정성을 비판하며 그녀가 살해당해 기록된 이미지를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윤금이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신체를 보여준 사진을 통해 피해자성의 순수성, 혹은 정치적 올바름 속 재현의 윤리논쟁이라는 사회적 집단 기억으로만 자리 잡았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을 맞아 윤금이와 미군범죄 근절대책 요구하는 집회. 오른편 끝 범죄사진이 작게 붙어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을 맞아 윤금이와 미군범죄 근절대책 요구하는 집회. 오른편 끝 범죄사진이 작게 붙어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년 전 윤금이씨 사진을 가지고 두레방에서 활동가들과 여성들이 대화[1]를 나눈 적이 있다. 활동가들이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 끔찍한 윤금이 시체 사진을 붙여대는 운동권에 대해 비판하자 한 여성이 코웃음을 치며 “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더 심한 것도 얼마나 많은데. 너네들은 이런 것도 못 쳐다보면서 무슨 우리를 이해한다고...” 라며 핀잔을 준 적이 있다. 이미지는 사실을 기록한다고 하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며, 심지어 그 눈앞의 사실도 카메라에 의해 재현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사진에 찍힌 대상을 진짜처럼 취급할 때 예상치 못하는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바로 ‘차이’에 관한 문제이다. 적어도 윤금이 사진을 두고 기지촌 여성들과 이곳을 바라보는 외부의 사람들 사이에는 확실한 경계선이 그어졌는데, 이는 살아온 경험과 권력이 다르면 이미지를 읽고 소비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계선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과연 ‘누가’ ‘어떻게’ 그 경계선을 만들고 있느냐일 것이다. 누군가는 1세계 백인남성 군인이 가한 성폭력의 흔적을 목도하며 자신과 윤금이의 신체를 동일시하면서 그녀의 몸을 반제국주의의 성스러운 투쟁의 표상으로 만천하에 공개해야 할 증거로 만든다. 반대편의 누군가는 망자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여성의 몸에 가해진 폭력을 전시하는 것이 끼칠 사회적 해악을 두려워하며 사진 자체를 금지[2]시키려 한다. 이와 다르게 윤금이가 살았던 기지촌에서 아직도 살아가는 여성들은 도무지 자신과 윤금이를 둘러싼 외부의 시선들과 동일시하기 어렵다. 기지촌의 여성들은 이 사진 한 장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과 이미지를 보고 난리가 난 사람들을 오히려 위선적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누가 우리의 고통을 알 것인가, 불가능한 일인데’라고 반문 한다.

고통의 앎은 경험한 자만이 아는 세계이다. 고통의 세계는 매일매일 반복되며, 평생 영향을 준다. 편견, 차별, 멸시와 같은 불평등이 만든 비가시적 폭력부터 일상적 구타나 성폭력과 같은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오직 경험한 자만이 느끼는 고통이다. 이를 종종 뼈 속에 새겨진 고통[3]으로 표현하는데, 최근 ‘트라우마’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전 국민이 이해하는 말이 된 것 같다. 이제 기지촌과 같은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유행하는 ‘트라우마’란 말 외에는 적절히 표현 할 길이 없다.  트라우마라는 말은 공감 가능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 안의 유일한 문제점이 있다면 자신들끼리 ‘고통’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일이다. 기지촌 여성을 어머니로 둔 혼혈인들은 부모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고 (이들은 대부분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한 번도 한국사회가 이들을 ‘국민’으로 받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픽션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 태어나 첫 기억이 ‘고아원 대문 앞’이고, 고아원 동료들 모두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과 같은 공휴일을 생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동료들 간의 협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교육과 취업 모두에서 배제되어 사회생활을 해 본적도 없고, 그저 술 마시고 도둑질하며 기지촌을 배회하던 것이 전부였던 혼혈인들은 물론 해외 입양을 가서 운이 좋아 성공한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모두가 ‘양갈보 자식’이란 말에서 자유롭지 않다. 창녀를 어머니로 둔 사회적 존재에게 고통의 서사 만들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난폭해지고 자신이 이 세계의 가장 심오한 고통의 대변자가 되도록 허락한다. 이제 현대사회에서 개발된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인해 그들의 고통이 구체적 양적 데이터로 표상가능하다 믿게 되면서 그들의 고통은 다른 종류의 트라우마에 빗대 표현되며 균일화된다. 이제 ‘인권’이란 눈으로 혼혈인을 보게 되니 그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누군지 인정하지 못하고 ‘순결한 여성’, 전쟁에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한 여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참여하는 폭력적인 동일시는 일방적인 힘의 흐름만을 보여주는 꼴이 된다.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보여주기에 앞서 그 대상을 지시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그 손을 소유한 ‘집단의 힘’의 정도를 가시화하는 표상이다. 윤금이 사진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금지 혹은 공개라는 기준을 만들고 있는지 질문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미지가 살아남는가? 사실 살아남는 이미지나 멸실된 이미지는 모두 정치적이다.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증명이 필요한 일이 되며, ‘피해자-되기’의 과정은 말과 이미지에 의존하게 된다. 기지촌 여성처럼 ‘낙인’된 사람들은 비록 살아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스스로 이야기 하지 않으며  오직 담론의 생산자들만이 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생각하고 발언한다. 말하자면 혐오나 편견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에 있다. 영화가 구술사 과정을 보여준다거나, 윤금이씨 사진을 보여주려는 것은 기지촌을 둘러싼 ‘기지촌 담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낙인 효과를 피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구술을 할 수 있는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는 이제 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