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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순의 출생은 1945년과 1947년 사이 쯤으로 추정된다. ‘한국 전쟁’ 이란 말은 잘 모르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지게에 지고 가다 강둑에 버리고 사라졌다고 기억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그녀의 첫번째 기억인 것 같다. 추정컨대 피난중에 아비가 어린 딸을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다음 기억은,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서울역이었다. 배가 고파 구걸을 했고 길에서 철 조각 등을 주워 팔아 겨우겨우 먹고 살았다. 하루는 배가 너무 고파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땅에 묻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사람들의 놀라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기억에는 한 여자 스님이 자신을 절에 데리고 갔다. 그녀는 절에서 온갖 허드렛 일을 했는데, 똥을 푸거나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거나,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새벽 염불까지 해야했지만 밥을 많이 안 줘서 도망 나오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다음 기억 역시 서울역. 사람들이 빨간 벽돌로 된 큰 창고같은 건물에 몰려 살고 있었다. 어떤 나쁜 남자가 자신을 창고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미군 담요로 만든 바지 가랑이 사이로 피가 흘러내려 질퍽거리던 고무신, 그런 자신을 측은하게 쳐다보던 나이든 여자들이 기억난다. 사실 절에 간 것이나 서울역에서 당한 성폭행의 시간 순서는 알 수 없다. 그 무렵 달리는 미군 지프차에 머리를 부딪혀 죽을 뻔 했는데 치료도 받지 않고 살아났다.

그리고는 짜장면 세 그릇을 사준 맘씨 착한 아줌마를 따라갔는데, 서울역 앞 소개소에 자신을 팔았다. 인순은 지금도 그 짜장면 세 그릇에 배가 차지 않았다고 분해한다. 다시 그 소개소에서 팔려간 곳은 남산 양동 사창가. 그 뒤에는 토벌[i]을 당해 불광동 소녀원에 들어갔다. 물을 주지 않아 밤이 오면 화장실에서 걸레를 짜 먹었다. 소녀원 원장이 밤마다 여자애들을 불러내어 강간하던 장면이 기억이 난다. 용감한 박인순은 노역을 하던 중 그곳을 탈출했다. 불광동 어느 가정집 빨랫줄에 걸려있던 옷을 훔쳐 입고 간 곳은 다시 서울역. 그리고 이번에는 소개소에서 파주 용주골 기지촌으로 팔려갔다. 여기서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가기 전까지 ‘엄마’라고 부르던 포주를 만났다.

처음 팔려올 때는 너무 어려서 양색시들 심부름을 하거나 골목길에서 ‘아이 해브 색시’라고 소리치며 미군을 끌어다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예쁜 드레스와 화장품이 부러워 자기도 몸을 팔게 해 달라고 포주에게 간청해 드디어 ‘양색시’가 되었다. 포주는 1년 열두 달 매일같이 동태찌개만 갖다 줘서 지금도 명태만 보면 이가 갈린다. 그러던 어느 날 파주 용주골에서 갑자기 미군부대가 사라졌다. 추적해보면 닉슨 독트린으로 미군이 재배치되면서 용주골에 주둔하던 미1사단이 본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인순은 ‘엄마’를 따라 의정부 뺏벌이라는 곳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영화를 촬영하면서 인순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니 1970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웃음과바늘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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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i] 미군 기지촌에서는 경찰의 단속을 토벌이라 부른다. 단속하는 장면이 마치 토끼몰이 하는 것과 비슷하여 토벌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상대 성매매 집결지에서도 ‘토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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