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구술사를 듣기 위해 굳이 오랜 시간 현장과 관계 맺기 할 필요는 없다. 구술의 방식 자체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인터뷰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와 예의, 대상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만 갖추면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낯선 관계는 법적 계약관계를 맺으며 명확해진다.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고 활용은 어떻게 하는지, 구술사 계약서에 적힌대로 하면 된다.

공공미술, 다큐멘터리, 현장연구 혹은 현장 활동을 할 때도 구술사 작업처럼 현장과 맺는 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 기지촌에 들어오는 외부인은 특별한 목적이 있으며, 따라서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고, 여기서 만든 생산물은 자신이나 돈을 지원한 기관의 재산(property)이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연구자는 자신의 논문을, 활동가는 시민단체의 성과를 통해 국가권력과 상대하는 중요한 교섭권을 획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2000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드나들면서, 한번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또 한 번은 활동가로, 또는 봉사하는 사람으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같은 현장에 있다 보면, 점점 현장의 시선을 빌려 외부를 관찰할 기회가 많아진다. 나도 기지촌에 사는 사람인양 기지촌을 방문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한다. 외부인들은 자신이 관찰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생각하지, 자신도 관찰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편이다. 간혹 여성주의 활동가나 연구가들이 ‘여성’으로서 미군들의 시선을 받으며 ‘대상화’되는 강렬한 경험을 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은 기지촌을 외부와 연결시켜주기 위해 들어오기 때문에 자신이 관찰당한 경험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민속지학자들도 마주침의 경험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기술하며 자신과 대상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자신이 이렇게 말하자 상대방은 이런 말과 저런 제스처로 반응 했다든지, 아니면 자신이 관찰한 그들의 규율, 일과, 습관이 무엇인지 기술하며 보이지 않는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결국 관찰자가 없는 자리에서 어떤 말이 오고가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는 기술하지 못한다. 오직 자신의 눈으로 경험한 세계만이 연구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래서 관찰과 연구가 끝난 뒤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여성들이 어떤 내용으로 그들에 대한 뒷담화를 늘어놓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글로 쓰든 영상으로 찍든 그림을 그리든 보이지 않는 뒷담화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간과 함께 한가지 더해 재현의 ‘포기’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다’와 ‘재현의 금지’ 그 사이 어떤 곳에 위치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매체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수 밖에 없다. 미디어가 인간의 확장이란 맥루한의 개념이 이곳과 저곳의 소통 불가능한 관계를 얼마나 가볍게 취급한 말인지 말이다. 그것은 일방향적 미디어의 상호 소통이 가능한 테크닉에 관한 것 뿐 특별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내부에만 머무를 수 없으며, 외부에서 어떤 매체를 가져와야 한다. 어떤 사건도 재현을 위한 접근이 없다면 존재는 했겠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는 영역에 속하게 된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메타버스, A.I 등이 앞으로 얼마나 유효해질지는 모르지만. 지금껏 생존한 박인순과 그가 그렸던 그림, 그리고 씩씩하게 돌아다니던 그의 몸은 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영화 속 매체이다. 박인순의 건재함은 영화에 여러 층위를 줄 수 있었다. 우선 박인순의 정제되지 않은 생애 이야기. 박인순이 경험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 특히 뺏벌에는 여성들이 절대로 들어서지 않으려는 골목이 있다. 옛날에 한 여성이 그 근방에서 목을 매 죽은 일이 있는데, 가끔 그녀가 골목에서 어슬렁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순 만은 폐휴지를 주우러 매일같이 그 골목을 돌아다니고, 때로는 나를 이끌고 뒷산에 올라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그 여자가 죽었던 나무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죽은 여자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인순도, 동네사람들도 알지 못한다.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이런 사람들이 섞이고 섞여 기지촌의 괴담과 설화가 만들어지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런 괴담조차 오직 기지촌 동료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그 귀신들은 오직 여자들한테만 보이고 마을 사람들한테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여자들은 숨죽여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죽음이 자신을 발견하고 함께 데려갈지 몰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인순은 여자들이 죽어나갈 때 스스로 반쯤 미쳐서 돌아다니고 있거나 자신도 죽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녀만이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을 헤갈하며 걷고 걸었다. 죽음이 자신을 쫓아오는지도 모른채 그렇게 죽음을 피해갔다.

한편, <거미의 땅>을 촬영할 때 뺏벌에서 버려진 개를 10여 마리 끌고 다니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와 골목에서 마주치면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했다. 한번 잡히면 미친 듯이 짖어대는 강아지들 사이에 파묻혀 적어도 1시간을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마을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혐오했다. 나이든 동료들은 그녀 얼굴에 드리운 죽음을 발견하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혹여나 그녀가 나중에 죽어서 자신을 알아보고 따라다닐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결국 여자는 <거미의 땅> 편집이 거의 끝나갈 무렵, 눈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의 집 마당에 발가벗은 채 누워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동네사람들이 동사무소와 경찰에 신고했지만 반나절이 지나서야 공무원들이 나타나 무연고 시신 처리해 버렸다. 평소에 그 여자와 마주치면 서로 으르렁 대던 인순은 여자가 죽은 뒤 자꾸 꿈속에 나타난다고 투덜거렸다. 여자가 뺏벌을 나가면서 자꾸만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꿈에 인순이 잘가라고 인사하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길 건너 고속도로 때문에 파헤쳐진 공동묘지의 뼈다귀들의 주인들, 수없이 반복되었던 뺏벌 골목의 죽음들, 그리고 여전히 골목을 배회하는 귀신들은 아직까지 기지촌 여성들의 기억과 꿈속에 살아있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의 흔적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영화는 박인순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 온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는 대부분 사라지고,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이야기란 그 중 희귀하게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소수의 소수만 여러 매체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심청전이나 흥부전처럼 말이다.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사라진 역사를 찾아내고, 상상하고 은유하며 사람들이 살아 온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구비문학[1] 연구라면, 이 영화는 큰 틀에서 구비문학처럼 픽션을 필요로 하는 사실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구비문학에도 위계와 낙인이 주는 보이지 않는 효과가 존재한다. 이야기 속에 보이지 않는 고통의 리얼리티가 있다. 만약 심청전에서 심청이 효녀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면 결국 동네사람들과 아버지가 공모 하여 심청을 청나라 상인에게 팔아넘긴, 즉 인신매매 한 이야기도 가능하다. 만약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달하는 사람은 동네사람과 가족, 즉 가해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심청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기보다 자신의 죄를 사면받기 위해 심청에게 열녀효녀와 같은 유교적 서사를 입혀 주고 아비를 위해 목숨 바친 가장 진부한 이야기로 만들어갔을 것이다. 심청은 급기야 왕비로 환생하면서 모든 가해와 피해의 역사는 소멸되고 인당수 어딘가에 있을 원한은 말끔히 사라진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한 많은 귀신도 결국 살아남아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권력이란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다면 그 원한은 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귀신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기지촌 여성을 두려워하는 동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윤금이도 그녀가 누군지 아는 사람 가족[2] 외에는 없지만 적어도 ‘민족의 순결한 딸’로 기억되어 전해질 뿐, 윤금이의 끔찍한 두려움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기지촌에서 그 흔한 창녀에 관한 귀신이 전해오지 않는다. 나는 혹시나 하고 경기북부 기지촌의 모든 무당집과 양로원을 전전하며 기지촌 귀신이야기를 수집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떤 무당도 기지촌에서 몸을 팔다 죽은 영가를 느낀 적 없다 했다. 오직 이 이야기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그들의 동료 일 뿐. 동네사람들에게나 한국사회에서 기지촌 여성의 죽음은 측은하거나 윤리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기록이 된다면 말이다.

결국 기지촌여성들에게 금기시 되던 골목은 여성들이 사라지면 그나마 있던 타부(tabu)도 위력을 상실한다. 재개발이 진행되어 아파트라도 들어서면 그 공간에 깃든 수많은 이야기는 사라진다. 아무리 무서운 귀신이라도 장소가 파괴되면 원한의 기억도 흩어진다. 다시 말해 치유나 망각을 위해서는 뭐든지 철거하고 멸실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고통 받는 대상을 존속시킨 채 ‘치유’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그럴 때 치유되는 것은 외부인들이 느끼는 죄책감뿐이다. 만약 누군가 이들에 대한 ‘치유’를 기대하거나, 기지촌과의 만남의 목적이 ‘치유’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며, 오히려 당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당사자가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당신을 위해 배려하는 연기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알아듣기 힘든 비명소리에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지만 오직 동료들만이 이 언어를 알아듣고 침묵 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래서 판타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