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순은 20년 전 일어난 일이라도 마치 엊그제 일어난 것처럼 말한다. 내용도 중구난방인데다 말은 어찌나 짧은지  기승전결은 고사하고 짧은 몇 마디 외침에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기도 한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싫어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가버리기 일쑤다.  게다가 언제나 술에 취해 화가 나 있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모진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를 곰곰 톺아내 기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겠다.

먹을 것을 사이에두고 싸우는 나비같은 새

먹을 것을 사이에두고 싸우는 나비같은 새

한번은 카메라를 들고 기지촌 풍경을 찍으러 골목을 배회하다 식칼을 쥐고 골목을 헤갈하는 인순을 마주쳐 혼비백산 한 적이 있었다. 인순은 겁먹은 나를 쫓아다녔고, 삼각대를 펼쳐 들고 촬영하는 나의 주위를 빙빙 돌며 째려봤다. 한참이 지난 후, 한 10년이 지나 그때 일을 물어보니 ‘카메라가 반가워 그랬다, 왜 자기를 안 찍는지 궁금해서 쫓아다닌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기지촌 여성들은 카메라를 극혐한다. 얼굴이 어디서 공개 될지 두려워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특히 경계하는데,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박인순이 카메라를 왜 좋아하는지, 왜 영화에 나오고 싶어 했는지 알게 되는 데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 <나와 부엉이>(2003)를 만들 때만 해도 기지촌 여성단체와 영화를 만들다 보니 미군 상대 성매매, 인신매매 문제에 집중해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박인순 말고 동료 기지촌 여성 4명이 등장하여 성매매 착취에 관한 증언을 담았다. 얼굴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사람이 없던 터에 카메라 앞에 선 것 자체만으로 감사했다. 박인순도 그렇게 카메라를 허락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박인순은 기획의도에 맞게 피해자로서의 대답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린아이처럼 말을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인터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산으로, 들로, 나물 캐러 돌아다니는 모습을 쫓아 카메라에 담게 되었고, 두레방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에서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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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순의 그림은 그녀가 말하는 방식을 쏙 빼 닮았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유명한 전위 작가가 휘갈긴 그림 같기도 하며, 화장실에서나 볼 법한 저속한 낙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술교실에 참여한 다른 여성들은 실제 존재하는 것을 비슷하게 그리려 노력했다면 인순은 기분 내키는 대로 “씹딥미[1]!” 를 외치며 그려댔다. 술에 취해 휘갈긴 그림은 10분이면 튀어나오고 ‘물감 아깝다’는 동료들의 핀잔에 “낫 유어 뻐킹 비지니스[2]”라 쏘아붙였다. 어느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는 독창적인 그림들. 그런데 그림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이야기하다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본 이 낯선 이미지들은 있을 법한 것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경험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박인순의 그림 속에 기억이 담겨있고, 만약 그 낯선 이미지들을 엮어 ‘의미화’ 할 수 있다면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박인순이 그린 그림은 우리가 아는 사실적인 기호와 관계가 없어 보였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혹은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이란 이분법적 수사는 박인순의 경우에는 잘 들어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인순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창작이라는 행위는 결국 문자(교육과 학습)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의심해 볼 수 있다. 창작이란, 학습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상징들을 습득하는 과정이며, 그것의 감상 또한 교육을 통해 길러짐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고 욕망하는 상상력과 그것의 근원은  지식의 습득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원근법에 충실한 구상화를 볼 때, 혹은 이를 파괴한 추상화 앞에서, 또는 설치미술과 사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디서 미술을 배운 사람인가?”를 물어보게 되고 만약 이 작품이 갤러리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면 유명 작가의 것일 거라 추정한다. 두레방 미술심리치료에 참여한 회원들이 생각한 미술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미술의 기초는 ‘사실적 그림 그리기’라 믿었으며 그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비너스나 다비드 석고상이라도 세워 두고 한쪽 눈을 찡그리며 연필 데생을 배우는 장면들이 곧 ‘미술교육’이라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미술심리치료 선생님은 그리기를 매개로 여성들이 상처를 돌보고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우는 미술적 지식을 배제하고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며 자신의 상처를 표현하기 원했다. 하지만 그곳의 여성들은 한 번도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이 유치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생각했고 ‘공부’한 사람들처럼 그리기를 원했다. 미술 프로그램 과정에서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가 쏟아 졌지만 내가 보기에 여성들이 그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적어도 박인순만은 혼자 술에 취해, 있는 힘껏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 댔다.

피눈물을 흘리며 죽은 매독 걸린 환자

피눈물을 흘리며 죽은 매독 걸린 환자

‘자유로운 창작’은 만들어진 개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또한 우리가 투명하게 전달받고 있다고 믿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그 재현은 앞서 말한 교육, 상징의 습득 없이는 불가능하다.  반면 박인순에게 그림 그리기란 픽션과 논픽션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야기하기’라 볼 수 있다. 그녀에게  상상에 의존한 픽션이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한 논픽션이든 특별한 위계는 없다. 무엇이든 존재할 수 있고, 무엇이든 진실인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그 자체로는 존재 방식을 알 수 없는 어떤 것이고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픽션적 방식에 기대야 한다. 그것은 그녀의 꿈과 욕망이 스며든 상상력도 기억 속에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잠재태 같은 것이다. 인순의 이러한 그림 그리기는 오래전 시작된 습관이었다. 그녀가 서울역 앞에서 떠돌 때, 용주골에 팔려왔을 때, 어디서든 나뭇가지나 손가락을 이용해 땅에 그림을 그려왔지만 기록이 남지 않았을 뿐이다. 배고픈 새, 임신한 나무, 찌그러진 부엉이, 어깨 위에 앉은 악마, 썩은 몸과 벌레, 도깨비, 딸기가방, 이빨, 분수, 그냥 그린 그림 등 자신이 보거나 겪은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이 시간 순서 없이 섞여 있는 이 괴상한 이미지들은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재구성하고 해석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역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