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촬영하던 당시, 인순은 뺏벌의 집주인으로부터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무척 예민한 상태였다. 쇠락한 기지촌에도 예외없이 개발 붐이 닥쳐 부동산업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인순이 미국에서 돌아와 울화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와 열매를 따러 다니던 고산동 논밭은 그 즈음 대단지 아파트 단지가 예정되어 땅이 파헤쳐 지고 있었다. 신세계 백화점, YG엔터테인먼트 등에서 투자한 한류 공연장 들도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 옆에는 고산동을 가로질러 서울과 동두천, 포천을 잇는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있었다. 이 거대한 8차선 고속도로는 송산공동묘지라 불리는 곳을 가로지르게 되었는데, 아래쪽 옛길을 없애고 그 위로 콘크리트 구축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침 우리가 송산공동묘지 공원의 묘지기를 만났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고속도로 공사 인부들이 공동묘지 아래 쪽 길을 파헤치자 그 곳에서 뼈다귀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인부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뼈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하거나 뼈다귀 더미 옆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건축물 폐기물 통에 넣어 버렸고, 곧 소각했다는 것이다. 이 뼈들은 예전부터 박인순과 내가 걸어 다니던 길 아래 묻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의 첫 번째 영화 <나와 부엉이>에도 박인순이 이 곳을 씩씩하게 걸어 다닌다.

이 뼈다귀들의 주인은 모두 인순처럼 길 건너 뺏벌마을에서 온 여자들이다. 뺏벌에서 여자들이 죽으면 포주가 막걸리 한잔, 미제 담배 한 갑에 사람을 시켜 지게에 시체를 지고 길 건너 야산 아래에 묻곤 했는데, 이 곳은 원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생긴 자연 공설 묘지였다. 그런데 인부들이 여자들의 시체를 산 위까지 지고 올라가 봉분을 만들기에는 막걸리 한잔 가격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여자들은 봉분도 비석도 없이 묘지의 가장 아래 길가에 매장되었다. 이렇게 땅 속에 들어간 여자들은 서로 엉켜 붙어있다가 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오랜만에 세상을 본 것이었다. 이때 잠시나마 뼈다귀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레지는 않았을까?

송산 공동묘지 꽃분이 비석

송산 공동묘지 꽃분이 비석

이 묘지공원에서 그나마 기록이 있는 비석을 가진 뺏벌 여자는 매우 드문데, 그 중 한 명이 1995년 뺏벌의 한 마마상[1]이다. 그녀는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공동묘지 아래쪽에 묻히긴 했지만 동료들이 돈을 들여 ‘꽃분이’라고 새겨진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그녀의 무덤 앞에 꽃을 정기적으로 놓곤 했는데, 지금은 펜스가 쳐져 잡초와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 봉분과 비석을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영화는 꽃분이의 무덤을 벌초하는 이미지로 시작하게 된다.

꽃분이들은 비단 의정부 뺏벌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파주 DMZ인근, 동두천 상패동 공동묘지, 강화도의 어느 논밭 옆 야산, 임진강 적벽 위, 포천의 군부대가 있는 야산, 철원의 야산 등 경기북부 어디에나 꽃분이 뼈다귀들이 산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다. 이 뼈다귀의 주인들은 쉽게 잊힐 만큼 결코 적은 숫자도 아니었지만 왜 기록이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일까? 그 결과 우리는 꽃분이 자신만의 이야기, 즉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로 기입될 수 있는 이야기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면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라진 역사를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기획되었다. 이것이 바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며 믿거나 말거나, 혹은 있을 법하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우화처럼 시작하는 까닭이다.


<aside> 💡 [1] 마마상은 일본 기지촌과 유곽의 은어인데 ‘마마’는 엄마이고 ‘상’은 일본어로 누구누구 씨이다. ’마마상’은 포주가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한 중간관리인, 혹은 클럽 매니저를 말한다. 대부분 마마상은 아가씨 출신의 중년 여성이 하게 된다. 그들은 클럽에서 바텐더 역할과 계산과 청소를 담당하며, 아가씨들의 식사 및 보건소 방문 등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는 하숙 관리인이기도 하다. 마마상의 인건비는 2000년 초 3~40만원  정도 수준이었다. 마마상들도 젊은 시절 오랫동안 포주에게 구속되어 있다 보니 저임금에 대해 불만이 없었고 숙식이 제공되는 것으로 포주들이 마마상들을 관리했다. 대신 포주들은 마마상에게는 적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며 생색을 내고, 마마상들은 포주를 큰언니 혹은 엄마로 부르고 아가씨들을 동생 혹은 딸로 부르며 유사가족 같은 형태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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