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8년 <아메리칸 앨리>사진전을 위해 출간한 브로셔에 실린 에세이 중 하나입니다)
American Alley, 2008, ArtSpace Pool
새벽 2시 반쯤
새벽 2시 반쯤, 밖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가 와르르 쏟아지며 현관문을 따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마리아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감싸 안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부들부들 떨며 들어왔다.
그녀는 클럽에서 일이 끝난 후, 친구 집에서 미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중 한 미군 이 마리아에게 뚱뚱하다며 시비를 걸어왔고 마리아는 욕설로 대꾸했다고 한다. 그러다 미군이 그녀의 가슴을 쳤고 마리아는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창문을 깼다. 그러자 미군은 그녀의 몸 뒤에 서 팔을 꺾고는 바닥에 내리쳐 머리와 등을 짓밟았고 한다. 러시아 여성들이 말리자 미군은 마 리아를 현관 밖으로 내동댕이치고는 한국경찰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러시아 여성들은 불법 체류 중이었던 마리아에게 빨리 피하라고 했고, 그녀는 그 길로 황급히 뒷골목을 통해 집으로 돌 아온 것이었다.
당시 나의 카메라는 거실 소파에 있었다. 언제나 촬영대기 상태였던 내 카메라는 마리아의 언저리 를 돌며 1년 넘게 그녀의 시시한 일상만, 그것도 마리아가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허락한 ‘아무것 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만을 줄기차게 촬영하고 있었다. 이 곳 기지촌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서 나는 여기에서의 삶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으며 단지 이곳에서의 여성 들의 삶이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 자체임을, 아니 단순하고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견디 는 것이 여성들의 삶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지금 미군에게 맞고 돌아온 이 순간은 그야말로 가장 ‘따근따근한 사건’이었 고 영화에서 ‘한방’을 건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늘 자의식이 강해 카메라를 의식하던 마리아는 이 순간만은 자신의 고통 앞에 순수하게 몰입하고 있어 내가 카메라를 든다고 해도 완전 히 속수무책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마리아의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나 는 속으로 호재를 부르며 이성적으로는 이미 소파에 손을 뻗어 카메라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하게도 나의 몸은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한 1초 동안 내 머리 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광경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이 순간 마리아의 상황을 함께 겪을 것인가, 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찍을 수 있을까, 이것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순간적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치다가 결국 나는 카메라를 가져 오지 못했고 그저 손을 뻗어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을 빼 마리아의 팔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고는 상처를 지혈했다. 우리는 혹시 경찰이 올까하여 집의 모든 불을 끄고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끅끅 거리며 울음을 참던 마리아는 자신이 한국에 온 결과가 이런 것이라며 동두천에 갇힌 자신의 삶을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그녀는 내게 왜 이 상황을 카메라로 찍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한국에서 겪 은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의 가장 비참한 모습을 보고 싶으 니 카메라로 자신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그토록 자존심과 자의식이 강해 내 카메라에 결정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던 그녀가 울면서 자신을 찍어달라고 오히려 나에게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녀에게 ‘괜찮아.. 안 찍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마리아는 미군부대에 가서 상해 비용을 청구하겠다며 나에게 증거용 사진을 찍어달 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 후에 내게 남은 증거는 이 ‘증거용 사진’ 밖에는 없다. 동두천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한 일주일간은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와 자학이 몰려와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앞으로 결정적인 순간이 또 나타날테니 기다리자’며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다큐멘타리를 찍는 2년여 동안 그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도 않았거니와, 자존심을 회복 한 마리아가 그런 상황에서 촬영을 허락하는 일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