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골에서 파주로 이주한 지 5, 6년 쯤 지나 인순은 뺏벌 옆 ‘이씨종중묘’에서 약을 털어먹고 절벽에서 몸을 날려 죽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무덤가에서 대마초를 피던 한 미군이 그녀를 발견해 떨어지려던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군의 이름은 리암 캐스카(Leon M. Cathalt). 그는 인순의 엄마(포주)에게 그녀가 진 빚(몸값)을 갚아주고 뺏벌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기지촌의 경제 논리는 미스테리하다. 아가씨들이 아무리 몸을 팔아 달러를 벌어줘도 포주들은 계속 빚을 얹어줬다. 여자들이 도망을 간다 해도 전국의 기지촌 포주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도망간 아가씨를 쉽게 색출했고, 도망가다 검문에라도 걸리면 군인과 경찰들은 아가씨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기지촌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포주의 입장에서도 여자들이 나이 들면 언젠가 퇴물이 되기 때문에 그 전에 미군에게 비싼 몸값을 받고 보내주는 것이 각종 병을 치료해주거나 뒤치닥 거리를 하는 것보다 수지 맞는 일이었다. 한편 미군의 입장에서는  한국이 전쟁위험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어 이 곳에서 가족이 생기는 경우 추가로 가족수당이 지급되었다. 자유로운 영외에서 생활하면서 가사노동과 섹스가 무료로 제공되니 결혼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기지촌 여자들을 나쁜 한국인 포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영웅’이 되는 뿌듯함도 누렸다.

인순은 1975년 즈음 리암과 미국으로 이주했고 <Roots>(1977)라는 영화를 함께 본 것 같다. 특히 리암은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마침 인순과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쿤타킨테[1]로 지었다. 이것 때문에 한동안 여성단체에서는 그녀가 미국에 두고 온 아들의 이름을 말할 때 폭소를 터뜨리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 아들 이름은 쿤타킨테고 딸 이름은 푸셀라(엘비스 프레슬리의 첫 번째 배우자인 Priscilla)라고요?” 매일 술에 취해 있던 인순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 아닌지 의심했고, 심지어 남들에 비해 지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그녀의 이야기를 심각하지 않게 치부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순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설득할 능력을 가지지 못해 ‘역사-이야기’가 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인순은 1975년에 뺏벌에서 딸 푸셀라(Priscilla)를 낳았다. 사실 프리실라의 진짜 아빠가 누구였는지 인순도 잘 모른다. 인순에 표현에 의하면, 어느날 정말 시커먼 미군을 하나 받은 적이 있는데, 푸셀라는 그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인순은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남편 리암에게 불러오는 배를 가리키며 “유 베이비! 네 애기다!”라고 하자 리암이 크게 기뻐하며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결혼하기 싫어 못되게 굴었지만 리암은 포기하지 않고 청혼을 했고 인순은 결국 그와 결혼했다. 당시 국제결혼은 서울의 종로구청에서만 증명서를 발급해 줬는데 남편과 의정부 미군부대에서 헬기를 타고 용산에 내려 종로까지 가서 혼인신고를 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인순의 혼인 기록을 찾아보다 실패했지만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준비하던 2016년, 서울시가 옛날 국제결혼 혼인신고서를 디지털화하여 공개했고, 우리는 그제서야 인순과 함께 서류를 신청해 혼인신고서를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박인순이 말하던 남편의 실체, 그의 영어 이름 철자와 시카고 집 주소도 알 수 있었다. 주소를 검색해 보니 유명한 할렘가였다. 내친김에 출입국 기록도 찾아보니 인순은 남편과 함께 1976년 3월 6일 미국으로 출국했고, 1982년 10월 2일 다시 한국에 홀로 돌아왔다. 그동안 인순에게 언제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냐고 물으면 항상 “대머리가 대통령 할 때[2]”라고 답하곤 했는데, 문서들이 그녀의 말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인순은 시카고의 시어머니 ‘마브로’의 집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하지만 남편은 곧 바람을 피기 시작했고 마약을 하느라 생활비 한 푼 주지 않았다. 한국이 그리워 어린 첫딸은 손을 잡아 걸리고 아들은 등에 업고 아시아 슈퍼까지 걸어가곤 했다. 힘들다고 딸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엉덩이를 두들겨 팼다. 2016년 우리가 시카고의 주소지에서 딸 프리실라를 찾아내어 확인해 본 결과 집에서 아시아슈퍼까지는 차로 가도 족히 30~4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 먼 길을 인순은 매일같이 걸어서 술을 사들고 돌아와 아이를 업고 동네 놀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해피스모크(대마초)를 피우는 게 일과였다. 인순의 말에 의하면 그 놀이터는 시카고 흑인 갱들이 마약거래를 하던 장소였는데, 어떤 경우는 갱들이 인순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신고하면 죽인다고 위협했고 인순은 “아이 스웨어 갓”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점점 약에 의존하던 남편은 돈이 떨어지면 인순에게 몸을 팔아 약을 사올 것을 강요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격렬하게 싸웠지만 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아 종종 군홧발에 머리가 짓이긴 채 집 마당에 팽개쳐졌다. 그런 인순을 시어머니 마브로가 측은해 했다. 마브로는 인순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먹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녀를 괴롭혔다. 슈퍼에서 김치라도 사오면 코를 막고 “쏘 스팅키!!”라며 못 먹게 했다. 인순은 시어머니 집에서 더 이상 같이 살지 못하고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서게 된다. 인순은 당시 딸이 언젠가 크면 자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카세트 테이프에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편지를 녹음해 뒀다고 한다. 마브로는 인순이 이별을 고한 뒤 대문을 나서자 그녀의 등 뒤로 “유 캔 컴 애니타임 마이 플레이스!”(You can come anytime my place!) 라고 소리쳤다. 인순은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한다.

인순은 오클라호마(Oklahoma)를 ‘오꼬마’로 발음한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인순이 일본 요코하마 기지촌에도 잠시 있었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인순의 이야기 조각을 맞추다 보니 미국 오클라호마(Oklahoma)를 말하는 것이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이곳 ‘오꼬마’에서 헬기를 타고 ‘와키키’에서 있다가 뺏벌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정황상 와키키는 하와이의 ‘와이키키’를 말하는 것 같아 물어보니, 자신은 한번도 와키키라는 곳에서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해 우리를 미궁에 빠뜨렸다. 그러다 2016년, 그녀의 딸 프리실라를 시카고에서 우여곡절 끝에 찾아내 만나보니, 리암의 근무지가 오클라호마에서 하와이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 전역에 있는 미군부대 앞에는 6,70년대 한국 기지촌에서 온 아가씨와 포주들이 만든 기지촌 마을들이 존재한다. 오클라호마 미군부대 앞에도 한인들이 정착해 만든 기지촌이 있었다. 인순은 지금도 자신이 남편한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남편을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와 헤어진 뒤 인순은 리암이 근무하던 미군부대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그녀는 시카고를 떠나 남편이 있던 오클라호마에서 ‘숙희’라는 여자가 운영하던 세븐클럽에서 일하게 되고 처음에는 화장실 청소, 서빙 등의 일을 하다 나중에는 한국에서처럼 미군들에게 몸도 팔고,벌거벗고 무대에 올라가 스트립 쇼도 했다. 세븐클럽의 주인 숙희도 한때 양색시였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동네 클럽 주인들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마치 뺏벌처럼 한국 식당, 슈퍼마켓이 즐비했다. 인순은 계속 복수를 꿈꿨다. 그녀는 전당포 쇼윈도우에 진열되어 있던 총들을 구경하며 ‘나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마음 깊이 다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총을 사용하는지도 모르고 가격도 비싸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한번은 클럽 화장실에서 백인 세 명에게 강간을 당하고, 복부에 칼을 맞는 일이 있었다. 피가 나 죽을 뻔 한 것을 숙희가 발견해 치료해줬다. 그때도 인순은 수술이 끝난 뒤 담배를 입에 물고 ‘하나도 안 아파’라고 말했던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인순은 컨테이너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한 번은 오클라호마에 엄청난 허리케인이 몰아쳐, 술에 쩌들었다 깨어보니 자기 집만 멀쩡하고 다른 컨테이너 집들은 박살이 나 있었다고도 말한다. 뉴스 라이브러리를 찾아보면 비슷한 시기에 오클라호마에 큰 허리케인이 닥쳐 컨테이너 마을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인순은 그 외에도 미국에서 낯선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3층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는데 멀쩡했으며, 미군들과 어울려 해피스모크를 하다가 함께 탄 자동차가 전복이 된 적도 있었는데 피 한 방울 안 나고 살아남았다. 아무튼 인순은 이곳 오클라호마 미군부대에서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되는데, 부대 안 이혼서류를 받는 사무실에서 사무관을 상대로 “마 허스번드 히 바람푸라이[3],히 김미 비디 아이 고 하스피털, 샷, 투머치 헐트”라고 외쳤다고 한다. 해석하자면 ‘나의 남편은 바람을 폈으며, 그 때문에 내가 성병을 얻어 병원에서 주사를 맞아야 했으며,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사무관이 이혼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아 스웨어 갓”(신에게 맹세한다) 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오클라호마의 미군부대에서 사라졌다. 인순은 곧 숙희에게 부탁해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는데, 그 곳은 바로 하와이 미군부대였다.

1979년 4월 10일 레드리버 밸리를 가로질러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강타한 토네이도는 70년대 미 중남부의 대표적인 허리케인 재난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1979년 4월 10일 레드리버 밸리를 가로질러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강타한 토네이도는 70년대 미 중남부의 대표적인 허리케인 재난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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