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순의 그림 <나와 부엉이>
2001년 박인순과 박경태가 뺏벌의 길 건너 고산동 논에서 촬영하고 있다.
채희숙
기지촌에서 각각 따로 찍으신 첫 작품들에 관해 말씀 나누고 싶은데요. <나와 부엉이>(박경태, 2003)가 먼저 제작된 작품이니까 먼저 이야기를 진행해보면 좋겠습니다. 박경태 감독님은 일단 비디오 액티비즘을 접하셨고, 액티비스트로서 두레방과 기지촌이라는 활동 공간을 주목하셨는데요.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하셨나요? 아니라면 ‘아 이제 카메라를 들어야겠다’라고 결정하신 시점은 언제고 왜 그러셨나요?
박경태
학교선배의 조연출로 따라다니다 두레방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죠. 그 무렵에 제 전공이었던 사회학과 조은 교수님이 옛날부터 찍고 계시던 사당동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저도 그냥 한두 번 같이 따라가 봤었어요. 거기서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기록을 위해서 찍는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후 저도 참여해서 촬영을 했어요. 기지촌의 경우에는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고요. 미군이 남한에 있는 건 알았지만, 미군에 의해 생겨난 캠프타운 같은 공간이나 성매매 집결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때였는데, 그렇다고 그 지역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평화운동이나 여성주의 활동을 하는 분들은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느끼고 하셨지만 저는 그런 감수성은 좀 둔했던 것 같아요. 그냥 게토 같은 판자촌 동네가 있구나 그런 생각에서 시작됐죠. 두레방에 새로운 원장님이 오신 지 얼마 안 됐었고 그전에 있던 스태프들은 독립해서 나가서 별로 활동가가 없었던 때인데 마침 제가 기지촌에 있겠다고 했어요. 뭔가 많은 고민이 있었다기 보다 선배가 자기 제작비로 베이스캠프 삼아 집을 빌렸고 제가 거기 살았어요. 그때 내가 영화를 찍어야지 했던 게 아니고 그냥 서포터로서 밤에 나가서 기지촌 풍경 같은 거 찍었는데요. 지금 골목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게 밤 11시~12시쯤 되면 미군들이 꽉 들어차고 큰 스테레오 카세트 들고 춤추고 맥주병 깨고 했어요. 기지촌에서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게 옛날에는 어깨 부딪히지 않고는 못 다녔다고 했을 정도로 제가 있던 동네도 미군 장사가 잘 됐었거든요. 그리고 거기 있으면서 저는 ‘누님’이라고 부르던 두레방 회원들하고 친해져가지고 밤에 누님들 일하는 클럽에 가서 그냥 앉아 있었어요. 그분들은 아가씨 생활은 옛날에 한 거였고, 그때 중간 관리 역할로 바텐더로 술 타주고 쥬스 타주고 하던 마마상이라는 역할들을 하셨어요. 여러 명이 계셨는데 미군들이 없을 때는 제가 말동무도 해주고, 술 같은 거 들어오면 옮겨주기도 했죠. 그러다가 미군들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홍대앞에 가서 돈을 다 쓰고 돈이 떨어지면 복귀하러 와서 거기서 마지막으로 술 한 잔 먹던, 돈 없이 와있는 곳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미군들도 그냥 아가씨들과 대화만 하고 있는 거지. 저도 미군들하고도 이야기도 해보고 당구도 같이 치고 그렇게 지내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그때 현장운동과 노동운동판에서 사진 촬영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어디서 컴퓨터를 많이 가져와서 기증을 해줬고, 그것을 각 여성들 방에다 설치해주고 저는 컴퓨터 가르쳐줬거든요. 그때까지 사실 저도 컴맹이었는데 컴퓨터를 기증받고 나서 누님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쳐야 되고 조립도 해야 되고 분해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한테 컴퓨터 배우고 이거저거 들어서 하나씩 알게 됐죠. 그래서 거기서 마우스 클릭하는 것, 컴퓨터 화투치는 것 등을 가르쳐드렸어요. 컴퓨터를 다들 되게 좋아하셨는데 처음 관문이 마우스를 더블 클릭하는 거. 그 기억이 제일 강해요. 누님들이 더블 클릭 성공해서 다 같이 박수 치고 막 그랬거든. 아주 소소한 것들인 거예요.
그때 제가 두레방에서 자원 활동하면서 청소하고 서류 정리하면서 나도 뭔가 기능적인 거를 좀 할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장 활동을 좀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운전면허 시험을 치러 갔는데요. 운전면허 시험을 치러 가는 날마다 누님들하고 떠들고 놀면서 합격이냐 아니냐 이런 거 갖고 재밌게 놀고 그랬었어요. 하루하루가 심심하니까. 그러다 학교에서 뭔 문제가 많이 생겨가지고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두레방에서 연락이 와서 이전에 기지촌을 찍기로 했던 선배가 하도 영화를 안 찍고 결과물은 없고 연락도 안 해주니까 저보고 대신 찍으라고요. 저는 촬영만 하고 다녔지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시민단체의 진정성이 참 좋았던 게 경력보다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다고 해준 거예요, 무슨 가족처럼. 사실 그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가 또 한편으론 기회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기획서를 써서 여성부에 냈고, 여성부에서 반성매매 교육 비디오를 만드는 비용으로 이천만원 지원해줬어요. 사실은 거기서 영화를 위해 쓴 돈은 거의 없어요. 장비 하나, 6mm 데크 같은 것 정도나 장만했지. 카메라는 제가 열심히 돈 갚아나가면서 샀고, 두레방에서는 밥만 먹여주고 가끔 교통비만 해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거지, 여기에 뭐 몇 백만원 몇 천만원이라는 돈은 사실 필요 없었어요. 원래는 한 2월 3월부터 찍어야 되는데 세미나 핑계 대고 뭉그적거리다가 4월 말인가 5월 초부터 찍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거 어떻게 찍어야 되는지 모르니까 일단은 기록하듯이 찍었어요. 그냥 앉아가지고 좋은 얼굴 하고. 근데 (선배가) 원래 찍으려고 했던 분들이 1년 지나니까 카메라에 대한 태도가 싹 바뀌어가지고 그전에 촬영했던 것들이 불발됐어요. 원래는 그분들하고 되게 친했었거든요. 누님 하면서 따라다니고, 그런데 카메라를 거절하니까 상처가 되는 거예요. 지금은 오히려 촬영대상이 카메라를 거절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나 미학적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요. 사실 대상이 카메라에 손쉽게 동의해서는 좋은 영화가 나오기 쉽지 않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너무 상처가 되는 거야. 찍을 사람이 없어진 거지. 큰일 났다 해서 그냥 동네 풍경만 찍고 있었는데요. 그 무렵에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생기면서 샹탈 애커만의 <국경 넘어>를 상영한 적이 있어요. 사실 그동안 많은 영화를 보지 않다가 내가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뭔가 배워야지 해서 그 영화를 봤고(웃음) 그 영화를 보고 좀 따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전부 다 자는 거예요.
근데 저는 잘 수가 없었던 게 바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까. 샹탈 애커만(Chantal Akerman)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하니 내가 흡수를 해야 된다, 그래서 공부하듯이 열심히 보고 와서 풍경을 그렇게 찍기 시작한 거예요. 그동안 누님들하고 이렇게 놀았던 게 되게 도움이 됐던 게, 그때만 해도 기지촌에서 카메라 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울 때고 위험할 때니까 제가 촬영을 하면 누님들이 보호를 해줬어요. 미군이 그때 한창 9·11 이후라고 부대 근처에서 카메라만 들면 어디서 보고 감시하고 있다가 바로 막았을 때였거든. 누님들이 미군과 싸워주고 포주들도 막아주고, “이거 우리 카메라야” 딱 이래버리니까 공간을 찍기가 좀 편했죠. 그러니까 아주 열심히 공간만 찍고 있다가 인순이 아주머니하고 만나기 시작한 거지. 뭔가 술에 잔뜩 취해가지고 식칼 들고 막 우는 인순이 아주머니를 (처음에는) 안 쳐다봤죠, 무서우니까(웃음). 아주머니가 식칼 들고 다니다가 나를 만나면 카메라를 보고 계속 따라다니고 그러는 거야. 나중에는 결국 아주머니가 반응이 없는 나한테 왜 자기를 안 찍냐면서 엄청 화를 내는 거야. 저는 그럴 줄 몰랐거든요. 자기를 찍으라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메뚜기를 잡는 박인순과 촬영중인 박경태
프라이팬에 메뚜기를 굽고있는 박인순
아주머니랑 인사는 나눴지만, 아주머니가 말은 짧지, 이유는 설명 안 해주지, 주위에서 촬영하는 걸 다 반대 했거든요. 단체에서는 이 작품이 뭔가 ‘증언’이 되어야 하는데 인순이 아주머니는 보여주기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요. 실제로 좀 그랬어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고. 미술 치료에도 한참 안 오셨죠. 실은 그게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나서서 같이 하자고 안 해준 거야. 그래서 우리가 두레방에서 다른 회원들과 미술하고 있으면 밖에서 배회하다가 괜히 두레방 문만 빵빵 걷어차고. 그러면 우리가 미술하는 게 싫은가 보다 싶어서 지나갈 대까지 조용히 있고 그런 상태였지. 본인이 하고 싶다는 거는 몰랐어요. 또 본인이 같이 영화를 찍고 싶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아주머니가 영화를 너무 좋아했고, 예전에는 성매매를 하면서 항상 극장에서 쉬었던 거지. 또 자기가 카메라에 나오면 딸이 어디선가 보고 자신을 찾으러 올 거다 싶은 마음에 ‘나 여기 있다’고 계속 알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아주머니가 저한테 설명 같은 거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무조건 저한테 찍자고 하신 거였죠. 저는 공간 풍경과 두레방 미술 프로그램을 찍고 있다가 이제부터 인순이 아주머니를 좀 찍어보려고 하니까 아주머니 말이 너무 분노에 차서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구술이라는 거는 상대방에게 알아들을 수 있게, 납득 가능하게, 누군가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야 되지 막 음절만 되풀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인순이 아주머니가 그때는 분노가 너무 심해서 알아듣게 하는 말씀을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저도 증언 같은 건 다 포기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아주머니가 풀 뜯고 돌아다니는 걸 같이 찍게 된 거에요. 그래서 영화의 한쪽을 인순이 아주머니의 일상인 풀 뜯고 술 먹고 괴로워하고 이런 내용으로 배치했어요. 그런데 제가 가려고 하는 이런 방향에 대해서 단체에서는 우려를 보였고 반대를 심하게 했어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기지촌이 어떤 곳이고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해야 된다는 계몽적인 성격으로, 이런 솔루션을 담은 TV식 교육적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요. 저는 그냥 다 내버려 두는 형태잖아요. 그래서 상황이 되게 안 좋았어요. 그런데 그때 두레방 이사로 안일순 소설가가 계셨는데, 제가 쓴 기획서를 읽고 제 의도를 듣더니 무지막지하게 디펜스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원래는 증언 부분도 아예 넣지 말까 했던 마음도 좀 내려놓고, 영화의 한쪽은 두레방 회원 분들의 증언을 배치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죠.
채희숙
그럼 <나와 부엉이>가 나오고 나서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박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