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숙 두 분이 각각 첫 기지촌 첫 작품인 <나와 부엉이>와 <아메리칸 앨리>를 마치고 나서 많은 고민과 성찰을 하신 후에 다시 기지촌과 관련해서 일종의 자기 업데이트를 공동작업을 통해 하게 되셨는데요. 어떻게 보면 두 분의 이전 작업이야말로 <거미의 땅>(2012)의 진정한 프리 프로덕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거미의 땅> 작업에 들어간 과정 얘기들을 좀 듣고 싶어요.

박경태 제가 <나와 부엉이> 이후 작업 과정에서 혼혈인들을 찾아서 전국을 뒤지고 다닐 때 뜻하지 않게 사라진 기지촌들을 계속 발견하게 되거든요. 그냥 시골처럼 보였는데 기지촌이었던 곳을 확인하면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사라진 기지촌’에 대한 어떤 개념이 들어오게 됐죠. 저의 두 번째 영화 <있다>(2005)는 혼혈인 박명수와의 관계를 쭉 찍은 작품인데요. 그때 명수 형하고 자기가 살았던 고향을 찾아다니면서 지금은 ‘전원일기’속 공간처럼 보이는 마을들이 옛날에는 경기 북부에서 가장 큰 기지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죠. 근데 이제는 다 없어지고 그냥 들판처럼 된 곳도 있고 아니면 폐허가 된 곳도 있었어요. 그래서 기억에 대한 관심이 그때 서서히 시작된 것 같아요. <아메리칸 앨리>도 그렇고 <나와 부엉이>도 현재의 사건들을 팔로우(follow)들인데, <있다>를 찍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지나간 것들로 관심이 옮겨갔죠. 그런데 생각보다 사라진 기지촌이 너무 많아서 옛날 미군부대 배치도를 구해서 직접 마을을 찾아가고 사람들의 증언들을 들어보면서 다녔어요. 생각보다 기지촌이 아닌 데가 없었을 정도로 경기북부의 많은 마을들이 사실 출발 자체가 기지촌이라고 봐야 돼요. 그동안 혼혈인들과 소위 라포(rapport)를 맺으면서 뭐 하고 뭐 하고,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사람이 아닌)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되겠다. 이렇게 동령씨하고 그 경험을 나누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사라진 기지촌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다녔어요. 촬영하면서 공간을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고, 또 촬영해 보고, 계속 반복하면서 어떤 곳을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죠.

김동령

저 같은 경우는 <아메리칸 앨리>를 완성한 후에 영화를 영화제에 낼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시네마달’이라는 처음 생긴 배급사랑 계약을 하고 경태씨랑 유학을 떠났어요. 사실 인디다큐페스티발 때 <아메리칸 앨리>를 상영한 후에 어떤 사람이 오더니 배급계약을 하자는 거예요. 처음에 사기꾼인가, 그렇게 생각을 했죠(웃음). 홍대 근처에 있는 사무실로 한 번 와보라고 해서 갔더니 너무 이상적인 계약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우리는 프랑스로 떠났죠. 우리 둘 다 너무 지쳐서 진짜 다큐멘터리가 꼴도 보기 싫을 때였고, 정말 좀 도망가야겠다 해서 유학을 간거죠. 그런데 프랑스에서 경태 씨가 꿈을 꿨는데 <있다>의 주인공인 박명수 씨가 꿈에 나왔어요. 경태 씨가 한국에 잠깐 들어가야 될 것 같다고, 전화를 해도 명수형이 받지 않는다며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중간에 한번 들어왔었어요. 잠시 방학 때 들어와서 박명수 씨가 살던 북아현동에 갔더니 그분이 돌아가신 거예요. 굶어서. 밥을 안 먹고 술만 먹다가 가셨다고 해서 둘이 엄청 충격을 받았죠. 다큐멘터리 감독 중에 가장 최악의 케이스는 자기가 찍는 주인공이 죽는 감독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된 거죠. 게다가 옆에 있어주지도 못했고. <있다>는 많은 영화제에서 거절 당해서 상영 된 적도 거의 없었구요. 그래서 되게 충격을 받은 상태로 프랑스로 돌아갔고, 거기서 <거미의 땅>을 기획하게 돼요.

박경태 맞아, 맞아.

김동령 그때 불어 제목만 있었는데, Entre Chien et Loup 이라고,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어스름녘의 상태를 말한다)이라는 제목이었어요. 기지촌의 유령이 배회하는 공간을 찍겠다는 프로젝트를 생각한 거죠.

박경태 명수 형이 죽었으니까.

김동령 그 프로젝트를 프랑스에 있을 때 부산영화제 AND제작지원에 냈는데 됐어요. 그래서 유학생활을 잠시 접고 들어와서 영화를 찍어야지 했다가 눌러 앉아서 한 2년 찍었나요, 우리가?

박경태 찍은 기간이 아니라, 발표까지 다 한 게 2년.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까지 갔다 온 게.

박명수와 박경태가 사라진 경기북부 기지촌을 탐방하고있다.

박명수와 박경태가 사라진 경기북부 기지촌을 탐방하고있다.

채희숙 영화에 관심이 없던 비디오 액티비스트 박경태 감독님과 영화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이 명확하셨던 김동령 감독님 두 분께 어떻게 합의 가능한 통로가 생겼는지 궁금한데요.

김동령 경태 씨가 먼저 두레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잖아요. 저는 2004년도에 두레방에 갔구요. 그때 경태 씨가 한창 인권위 혼혈인 실태조사를 한 다음에 <있다>를 만들고 있었어요. 저는 두레방에서 일하다 <아메리칸 앨리>를 만들게 되었고, 당연히 서로의 작업실에 놀러 가게 됐죠. 그래서 경태씨가 찍고 있던 촬영본도 보게 되고, 그때부터 정말 많은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연애도 하고. 그리고 결혼을 하고, 동시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거죠. 그런데 앞으로는 공동 연출을 하자, 그런 심각한 얘긴 안했던 것 같아요. 결혼을 언제 하자, 뭐 이런 얘기도 심각하게 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요. 그냥 하다 보니까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하다 보니 유학을 가고 있었고... 하다 보니까 공동연출을 하게 된 것 같은 기억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건 영화 이야기를 계속 하다 보니까…

박경태 그렇지.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영화 이야기를 계속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나의 아이디어나 창작이 이야기되면서 나만의 것이 아니게도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를 나 혼자 만든다는 건 자신이 없어지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거미의 땅>은 오랫동안 그래서 굉장히 많은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거죠. 또 시민단체에 있다보면, 거기서 일했던 그런 분들에게 영화는 언제나 그냥 수단으로만 있었고, 특히 현장 사람들과 관계 맺는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너무 달랐어요. 정치적인 인식 자체가요. 저는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서도 바로 나하고 지금 부딪히고 있는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해야겠다는 입장이어서 약간 봉사 개념도 좀 있고 좀 더 친밀하게 적극적으로 들어가는 경우였는데 당시 두레방은 그러지 않았죠.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 거리를 두는 편이었는데 단체는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단체 안에서 더이상 생산할 수는 없었고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었거든요. 당시 두레방은 혼혈인들을 지원할 능력과 자원이 없었어요. 혼혈인들이 워낙 거칠고 폭력적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저는 좀 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면서, 단체를 나와서 현장 사람들과 직접 관계맺기를 하게 되었고, 한편으로 가벼워지기 시작했지만 ‘활동가’적인 게 사라지다 보니까 그동안 관계 맺었던 사람들하고만 깊어지게 되고, 다른 관계가 더 확장되지는 않았고요.

김동령 경태 씨가 2003년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태조사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혼혈인을 찾아다닌 경험 이후에 <있다>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딴 얘기지만 그때 <있다> 촬영소스들을 보는데, 촬영된 영화의 재현력이 너무 다른거에요. 무슨 카메라로 찍었지? 눈이 번쩍 떠지더라고요. 물어보니까 24p로 찍을 수 있는 카메라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파나소닉 dvx 뭐였죠?

박경태 파나소닉 DVX-100a, 100b

김동령 (웃음) 그래서 제가 그 카메라를 똑같이 따라서 샀고, 그걸로 <아메리칸 앨리>를 만들어요. 그때까지 저는 소니 pd-x10이라는 되게 작은 카메라로, 30p로 찍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파나소닉으로 바꾸고 전에 소니로 찍던 100시간 가량의 분량을 다 버려요. 사실 그 100시간이라는 게 다 버릴 수 있는 그런 퀄리티였어요. 주인공이 정해지기 전에 카메라를 휘두르고 다니면서 엄청나게 많이 찍었던 것들이 100시간 정도였고, 그걸 싹 다 버리고 파나소닉 dvx-100a로 바꾼 뒤에 다시 정색하고 찍은 장면들로 <아메리칸 앨리>를 만들었어요.

박경태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웃음), 6mm 장편영화를 24프레임으로 처음 만든 게 저예요.(웃음) 이건 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왜냐하면 이 6mm로 24p를 만들기 위해서 인터넷 영상포럼에서 엄청난 논쟁과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걸 통해서 제가 영화를 만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