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숙 <거미의 땅>에서는 감독님들께서 직접 내레이션을 하셨는데요. 그게 전체 영화를 우화로 연결해주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도 내레이션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레이션에 대한 고민과 결정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박경태 저희의 내레이션을 넣는 거는 상당히 큰 결심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 속에 들어가서 정확하게 표지판을 ‘탕탕탕’ 찍어주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그때 가졌던 원칙이 이미지로 보여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거라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공간에서 소리가 좀 더 울리는 느낌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소리는 어떤 소리여야 할까 했죠. 처음에는 현장음을 따기 위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해서 <거미의 땅> 보면 사운드에 몇 군데 인상적인 것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현장의 사운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거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안성자 씨가 맨날 우리한테 많은 이야기를 폭발시키듯이 했는데, 그것들을 담아내지도 못하고 표현도 못하고 했던 것을 공간의 소리에 대한 고민하고 합쳐본 거예요. 그러면서 결국은 안성자 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자고 된 거죠. 이야기라는 게 전달되고 나면 우리에게 그 양식과 교훈 같은 것들이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기지촌 가족을 형상화시킬 수 있게 애니와 세라를 만들자고 해서 김동령 감독이 ‘애니와 세라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가 공간에 묶였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시도해본 거죠. 거기서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그러면 또 다른 톤의 우화로 프롤로그 부분에 좀 개념적인 우화를 해보자고 생각해서 ‘고통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죽어서 운동에너지로 변한다’라고 썼어요. 인순이 아주머니가 엄청나게 많이 걸어 다니고 가만히 있지 않는 이유는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이거든요. 그걸 ‘운동에너지’라고 바꿔 말해서 계속 움직이는 ‘거미의 땅’을 표현했고, ‘거인의 이야기’라는 것도 경기 북부의 특징을 따서 말했고, 그렇게 조심조심 붙인 거예요.

김동령 나레이션의 많은 부분은 우리에게 오리지널리티가 있기 보다 안성자 씨가 우리와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할 때 말한 내용과 표현들을 많이 가져온 거예요.

박경태 안성자 씨가 그런 표현을 좋아해요. 70~80년대 낭만적인 느낌. 예를 들면 힘이 없을 때, 우울증일 때지. 움직일 수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고 흘리다 지쳐가지고 보니 베개가 눈물에 떡이 돼가지고 붙어 있는 것을 말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눈물 속에 과거가 있었어’, ‘눈물 속에 빛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평소에도 말씀을 하세요.

김동령 다른 사람들하고 말하는 방식이 많이 다르죠. 우리가 영화를 만들고 나서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1]에 갔을 때 심사위원이었던 한 일본 감독님이 저한테 오더니 박인순 씨 부분까지는 참 좋았는데 안성자 씨가 나오고 나서 너무 실망을 금치 못했다는 거예요. 안성자 씨 나오는 부분이 너무 작위적이다, 누구나 ‘애니와 세라’가 같은 인물일 거라고 쉽게 예상이 가능한 구조다 등을 지적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갔지만 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했어요. 이 영화는 미스터리물이 아니에요. 결국 애니와 세라가 같은 인물이었다는 걸 ‘서프라이즈’로 알리자는 영화가 아니거든요. 스포일러 같은 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영화란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 즉 자기가 살기 위해서 창조해낸 허구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지, 그 부분을 매끈한 장르 이야기로 만든 게 아니거든요. 영화 만들고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에 안성자 씨 부분의 내레이션이 유치하다거나 애니와 세라의 이야기 구조가 너무 뻔하다는 평가가 있는데, 세련된 외피를 갖추는 게 영화의 목적이 아니었어요. 영화에 대해서 기대하는 게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사실 이런 부분이 우리한테는 되게 흥미롭죠. 대체로 안성자 씨 부분이 제일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과 박인순 씨가 나오는 부분까지만 되게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로 두 부류로 나눠지더라고요. 박인순은 일단 너무 독특한 사람이고, 그나마 관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좀 접속하기가 쉽죠. 근데 안성자씨가 나오면서 ‘도대체 뭐하는 거지?’ 하는 거부감이 생기는거죠.(웃음) 어떤 영화를 기대하느냐에 따라서 되게 맥 빠지게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그냥 가랑비에 옷 젖듯이 빨려 들어가서 안성자씨 부분이 제일 강렬했고 아름다웠다고 느끼시는 분도 있고. <거미의 땅>은 이야기를 전달할 외부관객을 설정하고 이야기를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점에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좀 다르죠. 아예 처음부터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면서 우화로 들어가고 있다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죠. 물론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거미의 땅>보다 훨씬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또 반대도 있고요.(웃음) GV때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보고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은 이게 극영화냐, 다큐멘터리냐, 페이크 다큐멘터리냐, 장르를 굉장히 확정 짓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걸 꼭 감독 입으로 답을 듣고 싶어한달까.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우리는 이 영화를 극영화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아니다, 이 영화는 분명히 페이크 다큐멘터리다’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고요.(웃음)

박경태 우리는 촬영대상에 맞는 형식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거예요. 바비 어머니는 말씀을 잘하시니까 마치 할머니가 앉아서 옛날 이야기하듯이 하시죠. 인순이 아주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 중얼하시고 또 늘 걸어 다니거든요. 안성자 씨는 미친 듯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고, 춤을 잘 추고. <거미의 땅>에서는 그렇게 각 사람에게 적절한 형식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는 박인순의 형식, 누구의 형식 이런 것보다는 이야기 형식이 되게 했죠. 이 영화의 기획 의도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였거든요.

김동령 이야기는 분명히 어떤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지잖아요. 그럼 이야기를 누가 만드는가 했을 때 집단의 기억이 이야기를 만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이야기들은 ‘공식기록’으로 건져 올려지면 역사가 되는 거고 그러지 않으면 흘러가서 망각되죠. 이야기 자체는 당연히 사건을 경험한 사람, 목격한 사람, 거기서 생존한 사람, 아니면 그 사건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 등 여러 주체들이 만드는 거구요. 죽은 사람만 이야기를 못 만들죠. 그러니까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 때는 전지전능한 시점이 있어서 그 단일한 주체가 이야기를 완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들리고,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뼈다귀’였던 거고, 또 알고 보면 그게 박인순이었고, 이렇게 이야기의 주체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채희숙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어렵다는 느낌이 드는 게 의미가 숨겨져 있거나 모호해서라기보다는 의미의 층들이 많아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상당히 친절하지만 그 친절하게 나타나는 내용들이 많으니까요. <거미의 땅>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연결된다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그 안의 내용 각각들은 훨씬 더 독자적이면서 서로 충돌하니까 그걸 다 보려고 하면 소화하기가 힘든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그 각각의 이야기들을 좀 더 말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이야기는 박인순과의 소통에 실패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구자와 예술가의 이야기.

김동령 이 영화는 다양한 주체들이 지닌 이야기 방법이나 이유 등을 이야기하는 영화라서, 기지촌이라는 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 또 저희를 포함해 기지촌에 와서 무언가를 재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등장시켜야겠다는 것이 초창기부터의 생각이었어요. 내러티브와 상관없이요. 그들은 기지촌에 와서 ‘기지촌’을 알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인터뷰라는 형식은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기록에 남을 수 있는 좋은 최후의 방법이죠.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인순 언니 같은 사람은 인터뷰로도 잘 정리되기 쉽지 않은, 맥락이 있는 말로 소통 가능한 언어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죠. 그래서 우리도 인터뷰라는 형식이 실패한 경험이 많았어요. 교수 역할을 맡은 변중희 배우한테는 대사를 주지 않았어요. 주로 우리가 구술 생애사를 받을 때 하게 되는 질문들과 인순 언니의 대략적인 삶을 쭉 이야기해 드렸고, 그 안에서 배우가 즉석으로 질문을 하도록 했어요. 그냥 변중희 선생님과 몇 번 따로 만나서 구술 생애 인터뷰하는 방법을 연습했죠.

박경태 저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이 굉장히 비슷한 게 뭐냐면 아주 힘들고 어려운 대상을 만나면 만남 자체도 되게 힘들고, 자기도 상대방에 대한 어떤 미안함 같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다들 치유를 먼저 이야기하거든. 어떤 계기를 통해서 상대방이 좀 더 치유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죠. 저도 처음에 <나와 부엉이> 할 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이제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좀 하고 있지만. 교수로 나오신 분도 박인순이 치유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셨고, 우리는 그 생각대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바로 인터뷰할 때 그런 태도가 나왔고요. 인순이 아주머니가 어떤 생애를 살아왔는지 파악하는 데 저도 10년이 넘게 걸렸어요. 딸 푸셀라를 찾으러 미국에 갔는데요. 어떻게든 끼워 맞춰보니까 아주머니가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내뱉었던 말들이 다 사실인 거예요. 아주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아내는 데까지 15년이 걸린 거죠. 반면 보통은 당사자와는 짧게 만나고 많은 자료를 획득해서는 현장에서 작업한다고 하는 거예요. 호흡이 짧으면 위험한 것도 있고 과연 제대로 된 기록이 될까. 그리고 언어로 소통되는 이야기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을 기록이나 역사에 남기려면 보통의 우리가 흔히 이용하던 방법들을 그대로 적용하는 게 맞는 걸까. 구술사든 생애 기록이든 짧은 호흡과 흔한 방법으로 미시사를 구성해내는 방법들이요. 그래서 뼈다귀 이야기로 가는 거죠. 뼈다귀 이야기를 보면서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도 몰라요. 어디서 왔고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들에게는 괴담, 설화, 민담 같은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어요. 인순이 아주머니를 말하는 방식에서 좀 더 나아가서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기록과 역사를 고민해가야 할까. 첫 번째 관문은 역시 공식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수와 작가라는 대상이 중요했어요. 고급문화도 저항문화도 갖지 않은 인순이 아주머니와 뼈다귀들의 문화를 교수나 작가와의 만남과 부딪힘을 통해서 좀 더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 같아요. 미술 작가의 경우 우리도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는 작가들끼리 협업하거나 고민을 나누자 이런 기획으로 서로 만나기도 했는데, 기지촌에 있으면 여러 경로를 통해 미술이든 다큐멘터리든 많은 작가들이 와서 참 빨리 들어왔다가 나간단 말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할 일 끝나면 가야죠. 여기서 뭐 하겠어. 하지만 그러면서 남겨지는 잔여물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 작업의 대상이 울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뭘 했다 해서 그가 치유가 좀 됐구나 하고 가요. 근데 그 작업의 대상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못 가게 자꾸 잡는단 말이에요. 더 있다 가라, 뭐 먹고 가자, 자고 가라 등. 왜냐하면 남겨졌을 때 그 고통의 시간을 알기에 유예시키고 싶은 거거든요. 근데 그거를 짧게 오가는 사람들은 잘 몰라요. 혼혈인들하고 만날 때 가장 힘든 게 뭐냐면 한 번 만나면 이 사람들이 나하고 헤어지기가 싫어서 엄청나게 부탁을 해요. 뭘 하자, 뭘 하자, 자고 가라, 그러는데 이 사람들하고 헤어지는 것을 기술적으로 아주 잘 해야 돼요. 그 헤어지는 순간에 내가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주고 있거든요. 혼혈인 다큐멘터리를 하고 나서 제가 그분들과의 만남 자체가 폭력이라고 흔히 말하는 게 바로 그런 맥락이거든요. 헤어질 때는 상처를 줘요. 우리는 착각을 하는 거지, 치유가 됐구나 하고. 치유가 아니에요. 하꼬방[2] 같은 데 혼자 남겨져서 기억이 떠오른 채로 있을 때 고통은 더 커지거든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 하면 사람들이 오가는 걸 저도 거기에 같이 있으면서 옆에 서서 봤기 때문이죠.

김동령 기지촌에서 언니들과 오래 있다 보면 언니들을 관찰하게 되는 게 아니라, 점점 그 언니들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더라고요. 하도 사람들이 썰물처럼 들어왔다 나가니까.

박경태 근데 거기서 우리 모습도 보는 거지. 깔끔하게 치고 빠지는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짧게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어떤 미지의 대상을 조우하는 순간, 책임질 수 없는 순간에 도망가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보기에는 집에 갈 시간이고, 그냥 인사드리고 가는 시간이지만요.

김동령 근데 이제는 세대적인 차이도 많이 나요. 우리가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다큐멘터리에서 ‘성찰적 나’ 형식이 유행이었죠. 타자들과 관계 맺기를 하러 현장에 들어가는 감독들도 꽤 많았구요. ‘성찰’이 어떤건지를 떠나서 그래도 감독이 타자와 어떻게든 관계 맺기를 시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게 있었어요. 그래서 박종필, 박기복 감독처럼 노숙자들하고 같이 생활을 해보거나 하면서 하면서 관계 맺기를 시도해보는 감독님들이 있었고,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이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대상과의 관계성을 성찰하는 거죠. 그게 성공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암튼 그게 다큐멘터리 감독의 당연한 미덕이라고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후에는 우리가 계속 얘기했던 성찰성의 기만적 측면이나,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많은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이 아예 현장에 들어가서 관계 맺기를 하는 방식의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프랑스에 갔을 때 그곳 다큐멘터리들을 보니까 확실히 타자와 관계 맺기를 하는 영화를 안 만들어요. 한편으로는 그런 태도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해 보려는, 시도해 보려는, 선을 넘어보려는 다큐멘터리들은 거의 나오지 않죠. 작가들은 이제 관계 맺기를 하지 않고, 안전한 거리에서 리서치를 통해 작업을 하려고 하고, 현장 사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흥미로워 하지만 선을 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굉장히 기겁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좀 비판적으로 보죠. 물론 탐욕을 경계하는 건 필요하죠. 현장에 대한 탐욕은 우리한테도 해당하는 문제라서. 우리도 항상 어딜 가든, 어떤 사람들을 보든, 작가로서 탐욕스러운 눈으로 보게 되고 리서치를 할 때도 저걸 좀 달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되는 거죠. 여튼 <임나도>에서는 우리를 포함한 작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좀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항상 대상만 바라보는데, 대상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울까 이런 것도 같이 생각해 보자고. (웃음)

채희숙 탐욕이라고 표현하셨지만, 매력을 못 느끼면 어떻게 뭔가를 할까 싶기도 해요.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굳이 극과 구분할 때 중요한 게 그 매력이 계속 그것을 촉발했던 대상에서 흔들리고, 그 매력을 규명하는 작업이 계속 대상과의 관계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돼요. 극에는 자기가 만든 인물과의 관계가 있다면, 다큐멘터리에는 통제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대상이 있다는 것? 감독이 느낀 매력을 계속 시험하게 만드는 박인순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다채롭고 크고 강하냐 하는 게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 많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요. 복수극이 박인순 아주머니의 꿈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연출 의도가 무엇인가요?

김동령 <나와 부엉이> 때 인순 언니가 그렇게 목을 잘라가지고 끌고 가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갑자기 그런 그림이 나왔죠.

박경태 <거미의 땅> 때부터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어요. TV든 어디에서든 뭔가를 본 것 같은데요. 인순 아주머니의 마음에 여러 가지가 겹쳐져 있는 것 같아요. 자기의 말을 아무도 안 믿어 주는 거예요. 아주머니하고 있는데 어제도 누가 찍고 갔대요. 그런데 제가 계속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누가 찍고 간 게 없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두레방 사람들도 바뀌어서 아무도 모르는데 10년 전에 두레방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 TV에 나온 적이 있는 거예요. 우리 영화에 넣은 영상이요. 그걸 엊그저께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시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우리 방식대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죠. 박인순의 언어를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거예요. 아주머니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그 말을 안 믿어 주고 심지어 나중에 어떤 사람들은 아주머니가 미국 갔다 온 것도 다 뻥이라고 안 믿어 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딸 이름이 푸셀라고 아들은 쿤타킨테라는 거예요. 거기서 다들 이상하게 느끼고. 저도 살짝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박인순의 ‘복수’안에는 바로 그런 세월들이 깔려 있는 거예요. ‘나는 진짜고 실제로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이 나를 몸을 팔게 했다’고 바위에 새기듯이 속에 가지고 있는 거죠. 누구나 인순이 아주머니 같지는 않아요. 지난 일이라고 여기는 누님도 많아요. 물론 뼛속 깊숙이는 있겠지만요. 그런데 인순 아주머니는 계속 표현을 하고, 절대로 복수에 대한 일념을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여기에는 남들이 자기의 경험을 믿지 않는 상황에서 보여주고 싶고 증명하고 싶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전시하듯 머리를 끌고 가겠다는 것도 그런 욕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나와 부엉이> 때부터 복수하겠다는 거는 똑같았어요.

김동령 언니가 맨날 하는 얘기가 ‘나도 죽일 수 있는데, 감옥에서 썩는 게 싫어서 안 하는 거야’에요.

박경태 근데 그게 미국 남편 이야기였던 거를 이해를 못 하고 그때 두레방 사람들하고 활동가들은 지금 박인순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이해를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