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숙 결국, 잘린 미군의 머리가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그렇게 마치 복수극이 성공한 것 같지만 꽃분이도 원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하잖아요. 복수극의 결말이 그렇게 다양하게 나아가도록 하신 이유가 뭘까요?

김동령 일단은 처음 영화를 기획했을 때, 인순 언니가 자신이 남편의 목을 잘라서 끌고 가고 싶다, 그게 영화 출연의 조건이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만들자고 의기투합을 했고 저희도 신이 났죠. 미군의 목을 잘라서 끌고 간다는 상상만 해도 너무 좋잖아요. (웃음) 나중에 미군의 머리 모형이 나와서 머리 자르는 촬영을 앞두고 언니가 멋있고 무섭게 찍으라며 신신당부를 했는데, 웃기는 건 실제 촬영날에는 무섭기는커녕 너무 귀엽게 죽이는 거예요. 가위를 쥐어줬더니 언니가 가위로 동작을 뽀작-뽀작- 하는 거예요. “언니 우리하고 얘기한 게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거야”라고 항변하더라고요(웃음). 미군 역할을 했던 그렉의 얼굴 옆을 찔러야 해서 혹시 상처가 날까 봐 조심스럽게 하는 것도 같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거는 언니가 별로 죽이는 데 의지가 없어 보이더라고요. 우리는 언니가 실제로 자기 남편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영화 안에서나마 시늉이라도 내면서 자기감정을 해소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걸 기대하면서 장엄하게 찍으려고 했고. 그런데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하고 촬영을 해도 같은 태도가 나오는 것을 보고 뭔가 다른 게 느껴지더라고요. 언니가 죽이는 대리 만족을 느끼고 싶어서 우리한테 그 장면을 촬영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건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 거죠. 그래서 사실 약간 실망을 하긴 했어요. 영화에서 복수를 하는 언니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히길 바랐는데, 그런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클라이맥스에서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런 종류의 복수가 아니었구나 하는. 이 영화에는 시나리오가 없었기 때문에 그날 어떻게 촬영이 됐느냐에 따라서 그 뒤에 어떻게 촬영할지가 달라졌거든요. 항상 그날 촬영의 끝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건데, 만약 언니가 엄청난 에너지로 미군을 죽였다면 그 머리를 들고 가서 저승사자한테 집어던져서 다 같이 폭파시키거나 하는 결말도 가능했겠죠. 그런데 이미 전의를 상실한 사람 마냥, 머리를 자르는데 얌전하게 뽀짝뽀짝 하니까 그런 종류의 동력을 잃어버렸던 것 같아요. 또 언니가 머리를 끌고 가는 걸 너무 귀찮아하더라고요. (웃음) 그 장면을 처음 촬영할 때 속이 너무 시원하다고 하셔서 이게 하고 싶으셨구나 생각했죠. 그러다 계속 머리를 끌고 여기저기서 촬영을 하니까 너무 귀찮아하더라고요. 그래서 귀찮은 머리를 끝까지 가져가지 말고 그냥 중간에 떨어뜨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박경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머리를 잃어버리는 걸로 가자고도 했죠. 우리가 항상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잃어버려야 된다. 오히려 그 상징이 좋다 싶었어요. 그렇게 뇌물로 바칠 그 소중한 머리를 잃어버린 거죠[1].

김동령 그래서 인순 언니보다 더 약하고, 자기 이야기가 부족하고, 권력이 없는 이쁜이가 그 머리를 찾으러 갔다가 결국 소멸되고 인순 혼자만 저승 앞에 도달하죠.

채희숙

근데 이쁜이의 소멸도 그냥 소멸이 아닌 게요. 이쁜이의 소멸은 우울증으로 남았잖아요. 이쁜이의 이야기도 그냥 멈춰져 끝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태도로 보였거든요.

김동령 사람들이 아프고 비참한 과거 같은 것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얼른 돈을 벌어서 신분을 바꾸고, 늘 새로운 것, 미래만 생각하려고 하니까 기억 속에 기지촌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아요. 하지만 기지촌을 가능하게 했고, 거기서 돈을 번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죠. 인간을 팔아도 되고, 죽여도 되는 그런 태도는 자본주의 한국사회가 구성원들을 대하는 태도에, 특히 약자와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구조 안에서 사람들은 우울하죠. 기지촌은 그냥 비극적 한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되풀이 되는 거죠.

채희숙 그런데 박인순 아주머니는 자꾸 또 다른 이야기로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아요. 복수할 때도 보면 ‘그래, 네가 열심히 죽이고 있으니까 도와는 주지’ 그런 느낌으로 어딘가 한 발짝 더 멀리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허덕허덕하면서 박인순이라는 인물을 따라가게 돼요.

김동령 분명히 인순 언니의 일대기에 관한 영화를 찍고 있지만, 인순 언니는 구경꾼이에요. 본인을 촬영하는 장면에서 조차요. 언니는 항상 귀찮아하는 태도를 유지해요. (웃음) 그게 진짜 귀찮다는 것이 아니라, 언니한테는 뭔가 쿨한 거리가 있어요. 예를 들면 클럽에서 저승사자들이 인순 언니의 일대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잖아요. 사실 인순 언니가 필요가 없는 장면이에요. 근데 굳이 촬영장에 오려고 하죠, 그것도 카메라 앞자리에. 집에 가서 쉬시라고 해도 언니는 집에 있는 것보다 촬영장이 훨씬 재밌으니까. 그래서 나오고는 싶어 하시는데요, 뭘 시키면 끝까지 안 해요. (웃음) 우리가 내러티브에 맞게 동선을 짜고 있으면 언니가 카메라 앵글에 들어와서 뭘 하세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언니가 그 장면에서 뭘 하는 설정으로 바꾸고 그걸 언니에게 부탁하지만, 촬영하다 보면 언니가 없어져 버려요. 우리가 촬영하다 보면 갑자기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오신 거에요. 장면 연속성 때문에 옷을 갈아입고 오면 안 된다고 하면 ‘땀나는데 어떻게 하냐’면서 계속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거죠. 연속성이 안 만들어져요.

박경태 그러면 우리는 가발 씌우고 다른 뭔가를 하고 그랬죠.